상담 준비 완. 출장 준비 완. 모든 준비 완료. 이제 남은 건 의뢰인이 도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의뢰인이 안 온다. 약속은 9시, 지금은 10시. 무려 1시간이나 지났다. 왜? 잊은 건가? 하지만 약속 의뢰 시간 전까지 다크 나이트 사이트에서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든다.
"....사장님, 왜이래요. 평소답지 않게."
내가 불안해하는 걸 아는지 시엔이 말을 건다. 이 불안감은 의뢰인이 안 올까봐 든 불안이 아니다. 그냥... 의뢰인의 정체가 뭐일지에 대한 불안이다. 이렇게 시간 끄는 거 보면.. 설마 그 녀석인가.
그 생각과 동시에 벽이 열린다. 별거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의뢰인을 맞이하기로 한다.
"어서오세요, 다크 나이트 입니ㄷ..."
잠깐. 저 모습은 그때 브라잇 나이트에서 수리받던 손님 디안의 모습이 아니다. 저 모습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설, 또 만났네. 아니지, 브라잇 나이트 사장인 클라라인가?"
그분의 산소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오랜 친우이자 적. 모습을 숨기며 브라잇 나이트에서 수리받고, 다크 나이트에 의뢰하다니.
'클라라', 브라잇 나이트에서 사용하는 이름. 그리고 '설', 다크 나이트에서 사용하는 이름. 그러니 브라잇 나이트에서 사용하는 '클라라'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클라라=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정체를 안다는 건 큰일이였다. 그걸 아는 해리와 크레스, 시엔은 경계하고 내 앞을 지켰다.
"누굽니까? 누군데 우리 사장님을..."
해리의 말이였다. 이런 상황이 오니 날 사장님이라 하다니. 괜히 속에서 웃음이 났다.
"뭐야, 뭐 클라라의 개야~? 다들 으르렁거리고~"
이 자식은 여전히 능청거린다. 이래서 저 놈이 싫다니까... 애들은 개라는 말에 잠시 욱한 듯 했다. 이번에는 크레스다.
"개라고 칩시다. 당신은 뭔데요?" "나~? 니 사장 친구야~ 인상 좀 풀지 그래?" "야, 왔으면 헛소리 좀 그만해라."
그냥 둘 사이를 갈랐다.
"....여긴 왜 왔어." "으음~ 너 보려고?" "헛소리. 정체는 왜 숨기는데?" "에이, 섭섭하게~ 난 진심인데? 그냥 이야기 좀 하자고~ 그리고 나인거 알았으면 의뢰 수락 안 했을거잖아~ 너 재밌는거 좋아하는거 아니까 이러는 거지. 재미없었나봐?"
이 녀석... 또 무슨 말을 늘어놓으려고... 쳇, 귀찮게 됐군.
".....둘이서만 이야기 해."
.
"얘기해봐, 내게 온 너의 진짜 목적."
애들은 올려보내고 둘만 남았다.
아담. 그분의 2번째 창조물이자 그분의 대행자. 잘 말하면 나를 대체할 대체품이였다.
"별일 아냐~ 그냥 평소처럼 그분의 뜻을 전할 뿐." "아담, 아직도 너가 그분의 대행자인줄 아나본데, 그분은 이미 죽었어. 그러니 그분의 대행자는 없는 거라고. 알잖아. 너가 그분의 죽음을 부정하는 건지, 그냥 해본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헛소리할거면 오지마. 아까운 시간만 뺏지 말라고." "와, 아픈 곳 누르네. 나도 니 본명 불러줄까, 이브?"
'이브'라는 말에 인상을 썼다. 이브, 언제 적 이름인데...
"그게 팩트가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본명은 너가 먼저 불렀어." "....본명은 무슨." "부정하기는. 단, 그게 지금 내 이름이야."
단... 속으로 곱씹었다. 괜히 서로 건드려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단의 이름을 머리에 박아두기로 했다.
아담과 이브. 그분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붙혀준 이름이다. 뭐... 당연히 성경에서 따왔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지은 이유는 모르겠다. 추측하자면, 우리가 그분의 첫번째 '휴먼로보'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래, 단. 그럼 말해봐. 그분의 뜻이 뭔지. 헛튼 말하면... 알지?" "네네~ 암요, 잘 알죠~"
비꼬는 듯한 말투, 비릿하게 한쪽을 올린 입꼬리, 은근슬쩍 꼬는 다리, 보란 듯이 마시는 릴렉스티. 이 녀석이 진짜.....!
"그분은 우리를 위해 로봇도 인간처럼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어. 인간 같은 몸, 인간 같은 말투, 인간 같은 식사, 인간 같은 생각. 그런 걸 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지. 한마디로 겉은 인간, 속은 로봇이게 된거지.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릴렉스티를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그분 덕이야."
단은 다시 한번 릴렉스티를 마신다. 갑자기 그분을 언급하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과거 이야기가 그분의 뜻이야? 돌려말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성격 급하긴." "내 아까운 시간을 뺏지마라는 말이야." "하여튼 차가운 건 변함없네. 그래, 본론만 말할게."
단은 자세를 고쳐앉고 나와 눈을 마주한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모습. 입꼬리를 내렸다. ....중요한 말을 하려할때 나오는 버릇이다.
".....너, 이 일 그만둬. 그게 그분의 뜻이야." "일을... 그만 두라고? 어떤 거. 브라잇 나이트? 다크 나이트?" "둘다." "....참 나, 무슨 소리야. 이 일들을 그만둬야되는 이유라도 있어?" "당연하지. 그럼 이유없이 말하리?"
....일을 그만두라고? 브라잇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둘다? 말도 안돼.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심지어 새로운 직원을 뽑게 된지 하루도 안 지났다. 갑자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이유? 그래, 말해봐. 그 잘난 이유는 뭔데." "다 너랑 니 직원들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하. 나랑 우리 직원들을 위해서?" "그래. 너, 아직 걔네들한테 정체 안 밝혔지?"
정..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단은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야, 우리는 그저 인간을 흉내내는 로봇일 뿐이야. 진짜 인간이 된 게 아니라고. 기억안나? 우리와 그분에게 혐오의 눈빛을 보내던 그 연구원 놈들. 우리는 모두에게 혐오받는 휴먼로보잖아." "....그래서, 내 정체를 알면 직원들이 경악할거다?" "그것도 그거지만, 너의 정체가 손님들한테까지 까발려진다면?" "....뭐?" "너도, 너희 직원들도 살아남기 힘들게 되겠지. 이곳은 사이버 시티잖아. 소문이 어느 곳보다도 빠른 도시."
....하, 난 또 뭐라고. 그 정도는 예상했다. 내 정체가 밝혀질 위험성 정도는 계산했다.
"그래, 소문이 빠르지. 하지만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들킬 일없이 하는거야. 어차피 들키기 전에... 애들 곁은 떠날거니까 우리 애들 말고 너 걱정이나 해. 키라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너도 애써야 되잖아. 너부터 인연을 끊어내고 남 걱정하는게 낫지 않을까, 단?" "키라? 아, 래퍼드? 미안한데 나는 너와 달라. 사실 이미 래퍼드한테 내 정체 밝혔어. 그리고 걘 받아드렸고. 애초에 내가 휴먼로보인걸 사람들이 알아봤자 너처럼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타격없어. 근데 넌 아니잖아. 너뿐이면 모르겠는데, 니네 직원까지 타격받겠지. 너라는 사장님 때문에." "....."
생각 안 해본게 아니였다. 내가 휴먼로보인걸 사람들이 알게되면 나도, 애들도 힘들겠지. 난 인간을 흉내내는 끔찍한 로봇이라는 이유, 애들은 그런 나와 함께했다는 이유로 세상에게 배척당하겠지.
....싫다. 그런 끝은 절대 없어야 한다.
"이건 오랜 친우였던 나의 뜻이자 그분의 뜻이야. 그분은 우리가 휴먼로보가 아닌 인간으로 살기 바랬어. 누군가와 함께하는 지금의 일이라면.. 들킬 가능성이 높아져. 그러니... 그만둬." ".....쳐." "뭐?" "닥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오랜 친우의 뜻? 그분의 뜻? 친우는 개뿔.. 그분은 이미... 하, 모르겠다. 그냥... 내 앞에서 말해대는 저 녀석이 거슬린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신경쓰지 말고 닥치라고, 시x. 그냥 꺼져." ".....내가 잘못 건드렸나보네, 미안."
단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꺼져줄게. 그래도.. 꼭 명심해."
단은 출구로 사라졌다. 난 그저 단의 뒤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였다.
.
단을 보내고 올라오자마자 애들의 질문이 덮쳤다.
"사장! 괜찮았어..?" "어." "아는.. 사람이였어요...?? 왜 사장님의 이름을.." "어. 아는 사람이였어. 걱정하지마." "....뭐, 다치신데는 없죠." "응. 걱정은 고마워." "정말.. 괜찮은거지..?" "괜찮아. 오늘은.. 그만 쉬자."
애들을 뒤로하고 내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금전 일을 다시 한번 되돌아봤다.
갑자기 정체를 숨긴채 와서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던 단. 나뿐만 아니라 애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던 말들이 가슴에 박혔다. ....그러면 절대 안되는데.
부정하고 싶지만... 단의 말은 다 맞는 말이였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명확하게 핵심을 집고 갔다.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건가.
'오랜 친우였던 나의 뜻이자 그분의 뜻이야.'
그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