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펌) 천세태자비록 삭제본 - 20일 간의 기록2022-10-09 14: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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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soaring.postype.com/post/12713448




 < 1일 차 >

대마왕이 봉인된 후 정신을 잃은 태자는 천계로 옮겨졌다. 대마왕의 봉인은 천계에 있어 경사가 아니었다. 대마왕이 사라진 대신 태자를 할퀴고 갔기 때문이리라. 천계는 놀랍게도 나에게 태자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마 대마왕의 능력을 보았을 때 그게 최선이었으리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태자의 부상이 천계를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의원들 여럿이 태자의 상태를 진찰하고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고 돌아간 날의 밤, 태자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그가 나를 불렀다기에 단숨에 태자궁으로 달려갔다. 도로 불려온 의원 하나가 태자의 상태를 보고 있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였다. 태자가 의원과 곁을 지키던 이들을 물리고는 나를 곁에 앉혔다.


태자에겐 요괴에게나 있을 법한 뿔이 돋아 있었다. 손바닥 만한 크기였는데 머리 양쪽에 각각 하나씩 한 쌍이 돋아 있었다. 또한 눈 밑에는 흉터 같은 검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턱 한쪽엔 마법에 의한 것은 아닌 거로 보이는 상처가 나서 치료를 해둔 상태였다.


태자는 힘 없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쳤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조심스레 부탁을 했다.


-나의 상태를 기록해 주십시오. 들어보지 못한 병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입니다.

-허면 의원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 나의 몸은 선 현인이 더 잘 살필 것입니다. 당신은 의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를 다룰 수 있는 이 또한 이제는 선 현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의원들이 할 일을 나에게 맡기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나는 태자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금일부터 매일 태자의 상태를 기록하려 한다.



< 3일 차 >

태자는 첫날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으나 태자는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씹고 삼킬 힘도 없어, 모든 기력은 그저 잠을 자는데 쓰인다고 하였다.


-한 번 잠이 들면 깨지 못하고 내리 잠을 잡니다. 궁을 드나드는 선녀에게 물어보니 마치 죽은 듯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헌데 그리 잠이 들어도 도무지 개운해지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태자는 뒷말을 삼켰다.


-이겨내 보겠습니다.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태자는 제가 먼저 스스로 이겨내 보겠다 다짐했다. 그런 모습은 평소의 태자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 5일 차 >

-잠이 드는 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이들이 나와요. 그들이 다가와서 말을 겁니다.


나는 태자의 뿔이 첫날보다 자라있는 것을 확인했다.


-...스승님을, 내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나는 놀라서 태자와의 대화를 써 내려 가던 것을 잠시 멈추었다. 태자는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듯이 내뱉었다.


-내가 좀 더 힘을 썼더라면... 일을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또한 전하께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지만 좀 더 좋은 방법들이 뒤늦게 떠오릅니다. 그게 너무 괴롭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인 것 같습니다.

-꿈에 나오는 그들이 그리 말하던가요?

-......


태자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곧이어 태자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하며 도로 잠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 7일 차 >

-천자패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 현인이 연구하던 것인데... 


낮에 학자들이 태자의 병을 치료하는 해결책으로 내놓은 방안을 태자에게 일러주었다. 하지만 태자는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가능할까요.

-모두가 노력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다잡으십시오.


태자는 대답을 않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더 이상 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자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 10일 차 >

-부리는 이들에게 역정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태자는 병에 걸리기 이전과 같지 않았다. 깨어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작은 일에 화를 내고 고집을 부려서 아랫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전해 들었다. 온화했던 성품을 떠올려보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몸이 아파서 예민해진 것일까?


-무슨 꿈을 꾸었고, 무슨 기분이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협조해주시지 않는다면, 소신 또한 기록을 할 수 없습니다.

-선현인은 어찌 그리 매정합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이 꼴인 것 아닙니까! 내가 어찌 지내는지도 모르고...


태자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자가 그리 신경질적으로 성을 내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다. 태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짜증을 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답해주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여 면담을 끝냈다.



< 13일 차 >

의원들은 차도가 없다고 했다. 태자의 병에 대한 연구 또한 진전이 없었다. 대신 태자의 기괴한 뿔 만이 불쑥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태자의 기력을 양분으로 삼고 자라는 듯했다.


-내심 저 태자가 언제... 숨이 끊어지나,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다들?


난생처음 듣는 태자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몹시 낯설고 그 답지 않아서 분위기가 불편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들 전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걱정한다면 나를 이리 두지 않았겠죠. 나를... 내가 이리 되도록... 나는 이리 두려운데...


갑자기 태자가 숨을 헐떡이기에 의원을 불렀다. 그때 내려다본 태자는 불안에 떠는 눈치였다. 의원이 진료를 하자 태자는 다시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저 일시적인 반응으론 보이지 않았다.



< 15일 차 >

-살려주십시오. 나를 살려주십시오. 살고 싶습니다.


나는 놀라서 붓을 쥔 손을 내려놓고 태자에게 달려갔다. 잠에서 깨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한 말이었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조금만...


태자의 눈은 광채를 잃은 상태였다. 겁에 잔뜩 질린 채로 푹 꺼진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낮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나를 구하지 못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나를 살려주세요. 스승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나도...


밖으로 나가 의원을 부르려던 차에 태자가 잠잠해졌다. 거친 숨 소리를 내쉬며 태자는 한껏 차분해진 태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할까요? 그럴까요?


태자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 자리에 서서 태자를 좀 더 살피니 곧 잠이 들어버렸다.



< 17일 차 >

태자궁에 들어서면 머리가 아파진다. 태자궁을 드나드는 선녀들 중 한 명이 병가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자는 자는 동안 몇번이고 숨이 멈춘 듯 보였다. 나는 그때마다 태자의 호흡을 살폈다. 내가 방에 들어간 지 한참 만에 잠에서 깬 태자는 겨우 입을 열어 느리게 말했다.


-몸이 붙잡혀 움직이지 못할 땐 방법이 있더군요. 내려놓을 수록 나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곤 몇 마디를 더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곧 도로 잠이 들었다.



< 18일 차 >

태자는 12시진 내내 잠을 자는 중이다.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 19일 차 >

오랜 시간 만에 깨어있는 모습을 본 태자는 눈에 띄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또한 흥분한 것도 같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태자는 환희에 가득 차서는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제 새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강하고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고 왔던 짐이 사라졌습니다. 원하던 바 입니다. 나는 몹시 설레고 또한 반갑습니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고 걱정도 불안도 책임도 없습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되었습니다.


태자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기세였지만 나는 그것이 회복되었다고 보이지는 않았다. 모순이지만, 태자는 도리어 더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이제 아픈 태자를 단 둘이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는 잠시만 태자를 피해 있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었고 태자의 병약함이 나의 심신을 지치게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는 예전의 태자가 아닌 것 같았다.



< 20일 차 >

.



< 21일 차 >

쓰지 못 한 어제의 기록을 뒤늦게 남긴다.


천계 전체에 비상을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소란의 근원지는 천세태자궁이었다. 극락중앙도서관에 있던 중 태자궁으로 달려가니 멀리서부터 짐승 같은 누군가를 막아서는 병사들이 보였다. 놀랍게도 태자였다. 태자의 조심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난폭하고 거칠었다. 이미 내관과 선녀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아마 태자가 공격한 것이리라.


나는 태자궁 앞에서 문을 부수고 나온 태자를 마주 보았다. 검은 뿔은 찌를 듯이 솟아 있었으며 두 눈은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도무지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서 있었다.


태자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보였다.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력 있고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것은 결코 태자가 아니었다.


그때 그를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던 것 같다. 충격에 드문드문 상황을 잊어버렸지만 누군가가 나를 부축하던 손길은 기억한다. 그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한데, 나를 알아보았는지는 의문이었다. 태자는 자신을 대마왕의 신하인 혼세마왕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선 막아서는 이들을 뿌리치고 하늘나라에서 사라져 버렸다.


< 22일 차 >

상제가 사람을 보내 태자를 찾게 했다.


< 40일 차 >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 49일 차 >

메마른 대지에서 한 쪽 뿔이 잘린 마왕이 발견되었다.


< 63일 차 >

대마왕의 부하들 네 명이 천자문 비석을 파괴했다.


< 64일 차 >

상제가 천세태자의 기록을 말소시킬 것을 명했다.



선 현인은 마지막 획을 거칠게 그은 후 붓을 쥔 손을 멈추었다. 그리곤 이제까지 빼곡히 써내려 온 글자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어느 부분은 도무지 잊히지가 않아서 기록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영상을 틀어놓은 듯 눈앞에 펼쳐졌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피곤해졌다. 그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깊은 고민을 하는 듯 보였는데 그 표정이 슬퍼 보였다. 선 현인은 한참 만에 눈을 다시 뜨고는 이내 20일간의 기록을 적어 온 종이를 한데 모아 손에 쥐고 어그러트렸다.


종이 뭉치가 불에 닿아 단숨에 타오르며 사라졌다. 그때 그 순간 스승이 제 제자를 삼켰을 때와 같이 사납고 어그러진 형상이었다.


기록을 태워버린 후 선 현인은 다시 붓을 들고 새로운 천세태자비록의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마귀 마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 마법이었는지 알려주는 단편 팬픽. 

몇번을 다시 봐도 전율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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