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하얘진 머릿속에 검은 공포가 스멀스멀 들어왔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복도 끝으로 조심히, 한 발씩 내딛었다. 이 곳이 정말 내 집인지도 헷갈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흑백의 복잡한 머릿속을 뚫고 무섭다는 마음이 튀어 올라와 내 입으로 나왔다. “무서워.” 순간 내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방금 그 목소리가 진짜 나였는지조차 헷갈렸다. 모든 게 이상했다. 내가 아는 현실은 이런 게 아닌데,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게 현실이 아닌 걸까? 정신 없이 복도 끝에 도달했다. 그러자 소리가 멈췄다. 불안했다. 아까는 소리가 들려와서 불안했고, 이제는 소리가 멈춰서 불안했다. 복도 끝에 있는 건 신발이었다. 한 짝이 전부인 데다가, 운동화 끈도 무자비하게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쪽지 한 장.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너에 대한 소문은 아주 잘 퍼져 있었지. 모두 명백한 사실이었고.] …나는 왜 이걸 보고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내가 피해자 같지 않을까. 나는 가해자였을까? 너무나도 많은 질문들이 내 머릿속 흑백 공간을 덮쳤다. 흑백 공간이 하얘졌고, 질문들이 그림을 그려냈다. 이제 나의 대답으로 저 그림에 색을 입힐 수 있을까. 그런데 할 대답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나는, 인기가 많고 친구도 많고, 성적도 좋은 모범생이자 인싸였다. 그래, 모범생이었던 내가 어떻게 학교폭력 가해자였겠어. 그랬다면, 내가 기억했겠지. 무심코 쪽지 뒷면을 본 나는 경악했다. 겨우 해야 포스트잇 크기만 한 쪽지에, 콩알 만한 글씨체로 엄청난 게 써 있었다. [그 신발, 내 건데. 네가 하나 뺏어가서, 아니, 너한테 한 짝을 줘서 한 짝밖에 안 남았지. 모범생? 그딴 소리 집어치워. 그런 건, 선생님들 말고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아야 하는 거야. 하긴, 나는 네 친구 취급은 무슨, 사람 취급도 못 받았으니, 인정 같은 소리 지껄이면 안 되나? 아무튼 네가 아무 것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으니 내가 말해줄게. 너는 학교폭력 가해자였고, 나는 주도자인 너와 너에게 휘말린 네 친구들이 지독하게 괴롭히던 피해자야. 질긴 악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었지. 나는 아직도 놀랍다니까. 어떻게 초등학교 1학년부터 다른 애 한 명을 따돌리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안 놓아주냐? 놀랍다, 진짜. 그땐 내가 겁먹은 벙어리라 신고 못 했는데, 이제야 용기가 좀 생긴다, 야. 아무튼 마지막으로, 진짜 벌받기 싫으면 생기부 같은 거라도 찾아보고 오늘 저녁 8시까지 금호역 앞으로 나와. 그리고 나한테 정식으로 사과해. 나의 친우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이 개X끼야.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머릿속의 그림이 완성됐는데, 무언가를 잘못한 듯 찜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