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너에게 갈게 17화2025-07-10 17: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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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게


...아, 진짜 형답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폭탄 던져놓고, “편지 써줘” 하면 다인 줄 알아? 어휴... 근데... 또 답장 안 할 수가 없네. 형이란 인간은 항상 이렇게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놓고는 모른 척하지. 고약하다니까, 진짜.


일단, 엔비. 그 녀석, 형 방 뒤졌단 거... 듣자마자 피식 웃었다.
아, 미안. 웃으면 안 되는데. 아니 근데 솔직히 안 웃을 수가 없잖아? 걔는 태생이 그런 종자야. 말려봤자 말 안 듣는 애들 있잖아.
 

근데 말이지, 형이랑 나, 이렇게까지 오래 편지 주고받고도 서로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거, 이거 거의 완전 소설 아니야? 아님 첩보물?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그러나 진심은 가득한...” 뭐 이런 제목 붙여도 될 판이야. 근데 웃기긴 웃기다. 근데 또 그 웃음 속에 묘하게 씁쓸한 거 알아?


가끔 나도 그런 상상했어. 우리가 만약 진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면 어땠을까? 같이 싸움도 하고, 몰래 간식도 훔쳐 먹고...
물론, 현실에선 편지만 주고받다가 이렇게 뭔가 어설픈 미스터리 같은 상황에 휘말렸지만. 진짜 영화 찍는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형이 말한 거.
그날, 너랑 오공이 싸우던 마지막 장면. 나... 기억나. 정확히는, ‘기억나는 것 같아.’
어, 뭔지 알지? 그런 거. 머릿속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느낌. 분명히 나도 고개 돌렸을 때, 형이랑 눈 마주친 것 같은데, 그 순간이 너무 짧고, 너무 이상해서 내가 착각인가? 싶었거든.

근데 나만 느낀 게 아니라니까, 괜히 소름 돋더라.


더 소름 돋는 건... 그 이후부터야. 나도 뭔가 이상해졌어.
예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려. 모르는 사람들의 기억 같은 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심지어 내가 말한 적 없는 내 감정이 누군가한테 읽히는 느낌.
처음엔 그냥 스트레스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야. 형도 그렇다며?


솔직히 좀 무섭다. 근데 더 무서운 건... 그게 싫지가 않아.
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느낌, 누군가 내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나 미친정신 나간 거 아니지? 이거 정상 맞지?

나도 이제 더는 모르는 척 못 하겠어. 형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그대로 ‘누군가의 조각’으로만 살기 싫어. 진짜 나를 알고 싶어. 진짜 형도 알고 싶어.


그래서... 솔직히 말할게. 나, 형 본 적 있어. 확신은 없지만, 기억 속 어딘가에 형이 있어.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 조작한 건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근데 말이야, 이렇게 오래 편지 주고받은 우리가 정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진짜 누가 조작한 거 아니면, 우리 둘 다 대단한 건망증 환자야. 농담 아니고.


근데... 그런 생각도 들어. 혹시 이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큰 그림이라면? 

누군가 일부러 우리를 갈라놓고, 만나지 못하게 막고, 심지어 기억까지 조작했다면?
- 잠깐, 쓰다 보니까 진짜 너무 영화 같다. 대체 뭐야? 히어로물인가? 스파이물인가? 아니면...운명? 으악, 이건 내가 말하고도 닭살 돋는다


아무튼, 나도 알아야겠어.
형이 뭘 기억하든, 다 말해줘. 진짜 별거 아닌 조각이라도 좋아. 우린 퍼즐 맞추는 중이잖아. 

나도 계속 생각하고, 기억해볼게.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런 식으로 얽혀 있는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 형한테 조금씩 더 끌리는 것 같기도 해. 이 말 왜 썼지? 썼으니까 그냥 보낼게. 지우기 귀찮아.


그러니까 답장 꼭 줘.
이제 우리, 더 이상 모르는 척 안 해도 되잖아. 그렇지?


추신: 이제 난 세브를 처치하러 가는 중이야. 아무도 모르지. 이게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해리가

#너에게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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