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홍연(紅緣) 10화2025-08-06 20: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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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태와 해리, 파빌라]

유의태: 너에게 다시 묻겠다. 너는 천재이냐?

해리: ...천재라는 말,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 하나로 세상을 꿰뚫는 이들을 말하는 건가요?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원리를 곧장 이해하고, 타인의 열 걸음을 한 걸음으로 따라잡는 사람들?

유의태: ...

해리: 전,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병을 본다고 곧장 원인을 짚어내지도 못하고, 피를 본다고 침착해지는 편도 아니고, 책 한 권을 하루 만에 외우는 머리도 없어요.

유의태: ... 그래서, 너는 천재가 아니더냐?

해리: 하지만, 제가 아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누군가가 ‘살리고 싶다’는 얼굴로 곁에 있어 주길 원한다는 걸요. 그게 단 하루를 더 살게 하지 않더라도, 단 한순간만큼은 견디게 해주니까요.

파빌라: (이 아이... 나랑...)

해리: 그래서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다만, 그 절박한 눈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서툴고 더디더라도, 그 손끝이 누군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배울 이유는 충분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파빌라: ...!! (나랑... 비슷해...!!)

유의태: ...

파빌라: (이상하다. 평소 같았으면 할아버지는 벌써 돌려보내셨을 텐데...)

유의태: ...나는 평생을 의술로 살아왔다. 수많은 병을 보았고,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지. 그런데 말이다, 진짜 ‘천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도,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목숨처럼 아끼는 자다.

해리: !!

(해리를 향해 느리게 다가온다)

유의태: 머리가 빠른 자는 많다. 그러나 마음이 앞서는 자는 드물다.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못 한다. 하지만, 그 무지와 무능을, ‘남의 고통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덮을 수 있다면...배움의 문 앞에 설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파빌라: (할아버지가...저렇게 말하시다니.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던 말인데...)

유의태: (조용히 등을 돌리며) 내일 해 뜨기 전까지,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다시 와라. 그때부터 네 시간은, 네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자들의 것이니까.

해리: (고개를 돌리며)... 감사합니다.


[다음날 새벽]

(조용히 문이 열리고 파빌라가 나온다.)

파빌라: ...너, 진짜 온 거야?

해리: (미소 지으며) 응. 올 거라 했잖아.

(해리 옆에 툭 앉는 파빌라)

파빌라: ...보통 그쯤 말하면, 그냥 떠나는 애들이 더 많거든. 겉으론 끈질긴 척하면서, 속은 다 무너져서 돌아가더라.

해리: ...나도 무너졌는데?

파빌라: ...뭐?

해리: 그날 밤, 솔직히 집 가는 길에 수십 번은 생각했어.‘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밀리면 끝일까?’ 겁도 나고, 창피하고, 후회도 좀 했어.

파빌라: ...근데 왜 온 건데?

해리: 무너진 마음이 있다고 해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더라고. 겁이 났던 이유가 그만두고 싶어서가 아니라,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거든.

(말없이 해리를 바라보는 파빌라)

파빌라: ...하, 진짜 웃긴 애네. (그러다 고개 돌린다) 근데, 나도 너처럼 시작했어. 천재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고, 그냥... 지켜보고 싶었던 거. 아플 때 곁에 있는 사람, 그런 거.

해리: 난 몰라도 넌... 천재 같던데. 탕약도 바로 달이고, 약초도 다 외운 거 같았고...

파빌라: 내가 천재라고?

해리: 응.

파빌라: 그건...(말을 하려다 멈춘다) 됐어. 

 

유의태: 계속하고 싶다면, 계속 견뎌라.

(깜짝 놀라 뒤돌아보는 해리와 파빌라)

유의태: 의술은 마음으로 시작되지만, 기술 없이는 독이다. 배우겠다는 마음보다, 버틸 수 있는 각오부터 먼저 증명해라.

파빌라: (작게)...이 시간엔 안 나오신다면서...

유의태: 오늘부터는 나올 이유가 생겼다.

파빌라: 혹시... 또 그 사람들 때문인가요..?? 그...

유의태: (파빌라 말을 끊으며 해리를 본다)오늘은 마당부터 청소해라. 그리고 약초 밭, 네 손에 흙을 묻히고 직접 약초를 캐 봐라. 사람을 살리겠다는 자가 먼지 하나에 질색이라면, 당장 나가도 좋다.

해리: 아, 예... (모든 의술의 시작은 잡일이로군...)


[한편, 셰이와 시엔]

셰이: 가져왔어? 그 책. 홍연. (2화 참고^^)

시엔: 물론이야. 근데 이거 텅 비어 있던데... 어? 한 줄 채워졌네.

셰이: (풉 웃으며)

시엔: 왜? 

셰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니?

시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셰이: 진짜야. 그냥 물어본 거야.

시엔: 지금 그게 중요해...? 책에 뭐가 쓰였는지가 더...

셰이: (책장을 넘기며) 한 줄 채워졌다는 건, 누군가가 '진심'을 통과했다는 뜻이야. 이 책은... 진심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거든.

시엔: ...진심? 어떤 진심?

셰이: 응. 어떤 진심이든. 사랑, 증오, 후회, 그리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감정이 이 책에 새겨지지.

시엔: 그럼... 이 한 줄은 누가 남긴 걸까?

셰이: 그건 책이 알려주지 않아. 대신, 누군가가 숨기지 못하고 새긴 감정이라는 건 확실해.

시엔: ...그게 나라는 거야?

셰이: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네 안에 어딘가엔 그 감정이 있었다는 뜻 아닐까?

시엔: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거... 

셰이: 너, 그런 적 없어? 아무 이유 없이 누가 계속 떠오르고, 그 사람이 웃으면 괜히 같이 웃게 되고, 어쩌면... 울면 같이 아플 것 같은 기분.

시엔: ...

셰이: 그게 사랑이야. 그냥,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거. 그래서, 살아가고 싶어지는 거.

시엔: (작게)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셰이: 괜찮아. 사랑은 알아가는 거니까. 그리고 그 책이 알려주는 건, ‘몰라’라고 말하면서도 이미 마음 한구석에 들어선 감정들이야.

시엔: 이런 얘기 그만하고, 이 책을 가져와서 뭐 하게?

셰이: 말했잖아~ 궁에 의녀로 들어가라고. 이 책이 도움이 될 테니까.

시엔: 네 복수는?

셰이: 나야 뭐, 겸사겸사 하면 되지. 일단 네가 의녀가 돼야 내 복수를 도와줄 수 있거든.

시엔: ...

셰이: 거래한 거다?
시엔: 알았어.


[다음날 새벽]

파빌라: ... 헐... 벌써부터?

(해리가 혼자 엎드린 채 약초밭 흙을 손으로 헤집고 있다. 손엔 장갑도 없고 옷은 흙투성이)

파빌라: ...바보 같아. (속삭이듯)

(바람이 불고, 약초 더미 옆에 있던 삽이 넘어간다)

해리: (고개를 들며) ...파빌라?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해리: 아니겠지.

(멀찍이 숨어 있던 파빌라,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파빌라: ...정신이 나갔네, 저건.


파빌라: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못 참겠다.

해리: 파빌라? 네가 여긴 웬일이야..??

파빌라: 내가 왜 왔는지는 둘째치고, 야, 피 나잖아.

해리: (손을 살짝 뒤로 감추며) 아... 별거 아냐.

파빌라: 너 그 손으로 일하다간... 어휴. 별거 아니라고? 이거 찢어진 거 안 보여? 흙에 감염되기 딱 좋게 생겼거든?

해리: 나름 조심했는데, 하하...

파빌라: 웃지 마. 웃을 상황 아니거든.
(약초가방에서 약초즙을 꺼낸다)
파빌라: 자, 꼼짝 마. 이건 조금 따가울 거야.

해리: (조용히 손을 내주며) ...고마워, 파빌라.

파빌라: (약을 바르며 투덜거리듯) 진짜, 너는 사람 속을 뒤집어놔야 직성이 풀리냐? 이 시간에, 이런 손으로, 혼자서, 그것도 장갑도 없이 약초밭을 파헤쳐?

해리: 꼭 찾아야 되는 약이 있어서...그냥, 조금만 더 빨리 자랐으면 해서..

파빌라: 그렇게 다치면서까지? 바보야?

해리: 하하...


[시엔]

시엔: 진심이 아니면... 기록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이건... 뭐야.

시엔 (속으로): '당신이 떠나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굴 향해, 이런 마음을.

시엔 (작게): ...아니야. 그런 거 아냐. 걔는 그냥, 나한테 물 알려달라고 했던 일개 사환일 뿐이야. 그냥, 그거뿐인데...

#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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